이영균 교수
1945년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 한국의 심장외과 분야는 불모지였다. 37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지식과 수술경험을 얻기 위해서 1957년 8월 미국으로 건너가 2년 동안 미네소타대학에서 장기 연수를 했다. 당시 미네소타대학은 릴리하이(Lillehei) 교수와 그 심장 수술팀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의 국내 상황은 개선의 여지가 없었다. 다른 수술과 달리 개심술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여러 장비와 재료가 필요한데, 부속병원은 인공 심폐기를 사줄 여유가 없었다. 미네소타대학에서 쓰던 시그마 모터 펌프(Sigma motor pump)를 귀국할 때 가져와서 사용하였다.
1959년 국내 최초로 개심술을 시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첫 번째 개심술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인체에 대한 개심술을 성공적으로 시행하려면 동물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수많은 동물실험을 시행했다. 심장수술이 성공하지 못한 시기이므로 돌봐야 할 환자도 없었고, 연구비 지원도 거의 없어서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심장수술의 동물실험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1963년 국내 최초로 심장중격결손 환자를 대상으로 개심술을 통한 교정 수술을 진행하여 성공한 것이다. 그는 당시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는 재료상도, 실 같은 것도 없었다. 실도 미네소타대학에 있을 때 수술장 간호원한테 사정사정하여 버리려는 것을 얻어다 가져와서 소독해서 썼다.”
그는 실의에 빠져 방황하다가 다시 유학을 선택했다. 1965년∼1966년 스웨덴 웁살라대학의 별크 교수 문하에서 연구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몇 년이 지나 현대식 인공심장 펌프가 구입되었다. 당시에 그가 시행한 수술은 대부분 국내에서 최초로 시행하고 성공한 수술로 기록되었다.
이영균은 1982년 제4대 서울대학교병원장에 취임했다. 1983년에는 제6대 아시아 흉부외과학회 회장도 맡았다. 1986년 평생 몸 담았던 서울대학교병원을 정년퇴임하고, 1994년 8월 식도암으로 인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이영균은 국내 심장수술의 개척자로 오로지 흉부외과를 위해 산 사람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미래가 불투명한 시기였으나, 식을 줄 모르는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결국 심장수술의 도입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뜻은 아직도 흉부외과를 시작하는 젊은 후학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 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공적 사항에서 발췌하고, 이기진 교수의 자료와 부천세종병원의 기록을 참고함.
이영균 교수 약력
1994년 8월 별세
1968 초대 대한흉부외과학회 이사장
(이영균 교수님의 사진 등 관련 기록물과 회고담, 심장박물관의 기록에 대한 수정 등의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